리틀 나이트메어

recollection

J / 제이 2024. 6. 5. 20:07









  품 안에서 노움이 꼼지락거렸다. 무언가 말할 게 있다는 듯이. 노움들은 이곳의 토박이었다. 고깔 모자를 눌러 쓴 이 작은 족속들은 특별히 방해받지 않고도 어디든 작은 두 발이 허락하는 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살아있는 건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이곳의 먹이 사슬에서 유일하게 비껴나간 건 다름 아닌 그들이 이미 이곳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온갖 기이한 소문과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그와 달리 여기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움들은 대개 길 잃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들이 포옹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챘다. 첫째로 그들은 체온이 없어서 늘 몸을 덥힐 만한 게 필요했고, 둘째로 포옹은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기에 가장 편안한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노움들은 중요한 비밀은 알아듣기 힘들 만큼 가늘게 속삭이곤 했다. 비밀 그 자체는 아주 무거운 것이지만, 그것을 입에서 입으로 옮길 때는 아주 가벼워지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연기처럼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면 잠자코 먹잇감을 기다렸던 악몽들이 기어나와 이곳의 비밀을 알게 된 자는 누구든 순식간에 먹어치울 거라고.

  그들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진실된 건 아니다. 소문이라는 건 여러 입을 거치며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복잡한 미로 같은 이곳의 비밀을 해독해야 길이 보였고,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비밀이든 뭐든 들으려면 곧잘 포옹해주어야 했다. 노움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이제 저 문턱을 넘으면 방이 있을 거야.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움은 계속 말했다.


  [ 있지, 저 방엔 이야기가 아주 많이 모여 있어. ]

  — 이야기들?

  [ 그 이야기들은 잊혀졌어... ]

  
  노움이 낮게 속삭였다.


  [ 그렇지만 가끔은 중요한 게 생각나기도 해... ]

  — 그게 무슨 말이야?

  [ 널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어떤 것들은...
  들어가 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 네가 그 아이구나.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  너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어... 노란 우비 입은 소녀, 탈출하려는 아이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고 있다고 말야. ]


   노움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고깔 모자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 그런데, 넌 여기 아이가 아니라던데. ]


  그는 침묵했다.


[ 말해줘.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어... ]


  노움이 요구했다.


  [ 넌 어디서 왔어? ]
  










  ***




  녀석들은 대단한 악취미가 있었다. 천장에 사라을 거꾸로 매달아둔 다음 그 아래에서 빙빙 맴돌며 그 괴상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를 불러대는 짓도 벌써 다섯 번째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제발 다 닥치란 말이야. 머리가 다 울려서 지끈거렸다. 하지만 꽁꽁 묶인 두 손과 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손을 들어 귀를 막고 싶은데. 입을 열어 악을 써대고 싶은데. 그는 화가 났고 무서웠다. 무서웠고 화가 났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모를만큼.


  그때 문이 요란스레 열어젖혔다.


  곧이어 도자기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기억이 안 나.

  그는 짧게 대답했다. 노움이 이 이상 묻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속내를 안 건지 모르는 건지 노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더 캐묻지 않았다.

  [ 조심해...... ]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 기억은 점점 길을 잃어... 나중엔 이야기만 남아서... 저 방으로 흘러들어가. 다들 저기에 마지막으로 기억을 남겨두고 가는 거야. ]

  — 왜 하필 저기야?

  [ 저기서 가장 많이 잡혔어....... ]

  노움이 더더욱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 그 자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눈이 없고 귀가 아주, 아주 밝아. ...뭐든 들을 수 있지. ]

  [그렇지만 그 손아귀, 긴 팔을 잘 피하면... ]

  그러고 노움은 입을 다물었다.

  [ 이제 내려줄래? ]


  그는 노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노움은 비뚤어진 고깔 모자를 고쳐 쓰고 어디론가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억이라니.

  오로지 걸어온 등 뒤의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 그리고 그 사이에 때때로 찾아오는 허기. 그것만이 내게 주어진 전부야. 기억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어, 라고 그는 생각했다. 떠나올 때 모두 두고 왔으니까. 기억나는 것이 없다면 잃을 것도 뺏길 것도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겁낼 게 없었다. 결코 허황된 이야기 따위로 남지 않을 거야. 다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왼편의 방으로 걸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으니까. 살겠다는 끈질긴 고집 말고는.













  ***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Oi.”













  ***



  방은 아주 어두컴컴했다. 발 아래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저쪽에서 세로로 긴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건너편 문 아래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적어도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고 방 하나를 더 건너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 벽에 붙어서 몸을 수그리고 바닥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벽 쪽에 다다르기도 전에 정적이 깨지고 말았다. 벽이 어디쯤인지를 가늠하려고 뻗은 손이 무언가를 스쳤고, 스친 무언가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바닥이 요란하게 쿵 쿵 울렸고 걷잡을 수 없이 진동했다.


  이윽고 긴 팔의 사내가 문을 열었다. 녹슨 경칩이 앓는 소리가 사내의 팔만큼이나 길게 뒤따랐다.

  피부가 아래로 늘어져 눈이 가려진 사내는 듣던대로 아주 길고 긴 팔로 마룻바닥을 연신 더듬으며 맹렬하게 코를 킁킁댔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손끝을 피해 바닥에 난 틈 밑으로 기어내려갔다. 사내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불쾌한 소음을 일으킨 게 누구인지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양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사내의 기척이 바로 앞으로까지 다가왔다.

  그는 바닥 틈새에 눈을 바짝 대고 살폈다. 바로 앞에서 고약한 숨을 내쉬는 사내는 무척 커다랬다.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잘하면 이대로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조금만 소리를 내면 언제든 그 거뭇거뭇한 손을 뻗쳐올 게 뻔했다. 무작정 죽어라 달려나갈 수도 없고. 다만 여기저기 널린 빨랫감을 밟으면, 지금보다 사내가 조금만 더 옆으로 움직여 자신을 지나치면... 그러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침착해지자고 머릿속으로 되뇌며, 그는 사내의 짤막한 다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살폈다. 사내는 왼쪽에 상자가 있는 곳으로 슥– 슥– 바닥을 쓸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긴 팔이 상자의 어느 면을 더듬어 짚었다.

  그 순간 상자라도 생각했던 그것이 갑자기 밝아졌다. 커다랗고 높은 소리가 순식간에 방 안을 메웠다. 사내가 크게 날카로운 새된 소리를 냈다.

  그는 연신 코를 빠르게 킁킁거리면서 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떡하지. 그는 잠깐 주저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차라리 지금이 기회였다. 그는 틈 밖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바닥으로 올라오는 순간, 그 끔찍한 노래가 울려퍼졌다.






   배 안에서 악몽을 꾸었네
   — 나와 함께 가자!
   — 오, 안돼, 안돼, 안돼!
   그가 목을, 목을, 목을 매달았네
   — 날 떠나지 마!
   이 바다엔 이제 종치기가 없다네







  — 그건 텔레비전이었다. 상자 같은 게 아니라. 그것은 보란 듯이 거기에 놓여 있는 기억 그 자체,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수 백만 개의 작은 픽셀들이자, 하나의 커다란 눈이었다. 뿌연 노이즈가 가득 뿌려진 브라운관이 그를 내려다 보았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을 순식간에 선명하게 불러내고 있었다. 두고 왔다고 생각한 바로 그것들을.



  아냐, 기억하지 마.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절망적으로.












  ***



  갑자기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충격에 정신이 확 들었다. 끄으응, 하고 그는 힘겹게 눈을 떴다.

  처음 알아차린 것은 천장 구석에 오래 고인 얼룩이었다. 아마도 곰팡이와 오래 묵은 먼지와 벌레 시체, 그리고 무언가의 오물로 뒤덮인 그것은 여기저기 튀어 있었고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더러워.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저런 더러운 데에 매달려 있었다니. 그런 끔찍한 노래를 귀가 터져라 들어대면서...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아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처음으로 눈을 본 것 같아, 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는 그 애를.

  조그만 봉지 뒤에 가려져 있던 눈동자를.


  
  



  “ — ”









  ***



  아냐. 기억나면 안 되는데. 기억하면 안 되는데.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 얼굴을, 그 목소리를. 왜냐면,







“ —— 식스! ”









  떠올리면 약해지는 나를 참을 수가 없어서.




  기척을 알아챘다는 듯 뒤에서 그르릉대는 소리가 울렸다.


  식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덮쳤다.


















* 포타에서 Elephant in the room이란 제목으로 발행한 글. 퇴고하면서 제목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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