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나이트메어

togetherness

J / 제이 2024. 6. 5. 21:02




 
 
 
 
 
 
 
 
 
 
 
  이름을 안 것은 사냥꾼에게서 도망치고도 훨씬 뒤였다. 숨을 죽여야 죽임당하지 않는 때가 잦았고 잰걸음으로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매번 이어졌다. 그런 긴급한 때에 서로를 부르기란 저어—기 나 야아— 면 충분했다. 목소리의 크기와 높낮이를 달리하며 손짓을 섞어가면 그런대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대화가 꼭 길어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게 사적인 잡담이어야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잡담을 할 여유는 애당초 없었다.


  밧줄의 매듭이 풀어지자 소녀는 곧장 천장에서 떨어졌다. 소녀는 떨어진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 헉, 하고 숨을 짧게 들이쉰 걸 보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소년은 뻗은 손을 잠깐 뒤로 물렸다. 혹시 소녀를 채갔던 도자기 인형들이 소녀를 해코지했던 건 아닐까 싶어 걱정이 들었다. 하긴 천장에 매달아둔 것부터 아주 못돼먹었다. 밧줄의 매듭이 묶여 있는 판자를 부수는 데에 망치를 썼다지만 이제 소년의 손은 비어 있었는데, 소녀의 안색을 보아하니 놀라지 않게 천천히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재빨리 소녀의 손과 발과 얼굴을 살폈다. 심하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아프긴 아플 것이다.


  “저기——”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녀는 끙끙대면서 천천히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무릎을 굽히고 다시 한 번 조심스레 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소녀도 팔을 뻗었고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 소녀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소녀는 소년을 지지대 삼아 일어났다. 비틀거렸지만 괜찮아 보였다. 소년은 “이제 괜찮아”라고 말했다. 소녀를 달래는 듯한 온점과, 소녀를 걱정스러워하는 물음표가 말끝에 반반씩 섞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소년은 입 안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있어야 할 것이 거기에 없어서 텅 빈 것 같았다. 도자기 인형들도 깨졌고 소녀와 자신, 단 둘만 남았으니 충분한데. 무얼 잊어버린 걸까? 뒤통수가 갑자기 근질거렸다.


  소년이 입술을 오물거리는 동안 소녀는 말없이 스웨터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흐릿한 화장실 전등 아래에서 소녀의 부스스한 머리칼은 창백한 빛을 받아 회색과 푸른색이 감돌았다. 고개를 숙인 얼굴은 그늘졌고 소녀 주위로 떠오른 먼지 알갱이는 이따금 반짝거렸다. 소년은 속으로 아주 조금 놀랐다. 여태껏 옆에서 보아온 소녀는 결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한 두번쯤 훌쩍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깨어나자마자 놀란 것도 그렇고, 시끄러운 도자기 인형들이 소녀를 천장에 매달아둔 시간이 결코 짧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쏠리듯이 비틀거려도 곧 두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선 소녀는 새삼 다르게 보였다. 약하다고만 생각했었어. 소년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꽤 의연하구나. 너는—


  —아.
  불현듯 소년은 허전함의 까닭을 알아챘다.


  소년이 가만히 서 있으니 이번에는 소녀가 손을 이쪽으로 약간 잡아 끌었다. 왜 그러냐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내려온 앞머리 속 소녀의 새까만 두 눈을 소년은 새삼스레 바라보고, 여전히 놓지 않은 두 개의 다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제 얼굴에 뒤집어 쓴 종이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노(Mono).”


  두 음절의 제 이름을 말하는 게 이렇게 떨리는 일인 줄은 몰랐는데, 말하고 나니 속이 금방 동동 뛰었다. 소년은 혼자서 제 이름을 지었다. 언젠가, 불에 타 허물어진 건물 속에서 나타난 긴 손은 소년을 다행히 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같이 모여 있던 이름 모를 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아이들이었다. 저 자신처럼.


  이제 알고 싶어도 영영 모르겠지? 그 이름들을.


  손아귀를 피해 기어들어간 깨진 TV 안에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이제 혼자야, 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게 소년을 아주 많이 슬프게 했다. 그렇게 한참 웅크리고 있다가 문득 떠올린 이름이었다. 이제 나는 혼자야. 그러니까 나를 진짜로 지킬 건 나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득히 고여 빠질 줄 몰랐던 울음이 가라앉고 가슴은 이상하게도 시원해졌다. 누군가가 꽉 막힌 세면데의 고무 마개를 뽑은 것처럼. 소년은 때묻어 반질반질한 외투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밖으로 나와 땅을 두 발로 딛었다. 이름 하나 가졌을 뿐인데 소중한 비밀을 품은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그런 일이 있던 뒤로 누군가에게 이름을 가르쳐주는 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구도 소년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궁금해하는 이들도 여태껏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모노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가 있으니까. 여태 없었던 건 단지 그것 뿐이었다. 이름.
소녀는 모노의 손가락을 한 번, 모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소녀는 손을 놓고 모노를 가리켰다.


  “모노?”


  모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여전히 동동 뛰고 있지만 누군가가 저를 이름으로 불렀다는 게 기뻐서 뛰는 것이었다. 소녀가 그렇게 불러주자 정말로 세상에 자기라는 존재는 한 명뿐이라는 느낌, 그로 인해 특별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이번에 제 쪽으로 검지의 방향을 돌렸다. 모노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녀가 말했다.


  “식스(Six).”
  “...식스?”


  소년이 물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속삭였다.


“식–스—”


  “스—” 에서 소녀의 비뚤어진 이빨이 조금 보였다. 긴 발음이 바람 소리 같아서 모노는 웃음이 나왔다. 그 바람이 가슴 안으로 불어 들어온 것 같았다. 간질간질했다. 식스는 웃지 않고 샐쭉하게 입술을 물었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걸 자길 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놀리는 거 아냐.


  “대단해.” 모노가 말했다. 뭐가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이름을 알았다는 게, 이름 아는 자기같은 아이가 한 명 더 있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가 식스라는 것이, 못된 괴물에게 잡혀간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뛸 듯이 기뻤다. 그런 식스에게 모노라는 친구가 생겼고 모노에게는 식스라는 친구가 생긴 거였으니까. 서로의 이름을 나눠가졌으니까 친구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래, 친구. 진짜 친구.


  “식스. 대단해.”


  모노는 식스를 와락 안았다. 식스는 가만히 안겨 있다가 이내 팔을 들어 모노가 하는 것처럼 모노의 등을 천천히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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