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나이트메어

promise

J / 제이 2024. 6. 5. 20:45







  그 애는 약속을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식스, 하고 제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놓고서. 아, 그 목소리는, 그 이름은 얼마나 오래되었나.


  ...그 애가 이름을 불러 막상 돌아보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새끼손가락부터 불쑥 내밀고 있는 걸 보면 참 그랬다. 식스는 고분고분 제 손가락을 내밀면서도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거지, 싶었다. 이렇게나 작은 손가락들이, 서로 얽히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자기가 손가락을 걸어주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이게 왜 너한테 중요해, 하고 묻고 싶었다. 여기에 대고 너는 뭘 빌고 있는 거야.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거야. 무얼 바라는 거야. 언제 어떻게 끝장날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묻진 않았다. 손가락 마디를 굽혀 슬그머니 걸어주기만 해도 우스꽝스런 종이 봉투 아래에 옅은 미소가 피어나곤 했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 조금은 궁금해했던 것 같다. 이대로 손가락을 걸고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제가 묻지 않은 것들에 그 애가 답해줄 수도 있을지? 조금은 얼굴을 붉히면서, 어물어물한 목소리로. 하지만 그 애는 옅게 빙긋 웃을 뿐이었다. 어딘가, 모르는 딴 세상에서 온 것만 같은 미소. 그들이 여태 함께 지나쳐온, 단조롭고 얼룩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미소.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손가락을 놓으면, 그 애는 금방 토라진 양 입술을 꾹 다물고 뭔가를 채근하듯 노란 우비자락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놓곤 했다. 그 애는 꼭 그랬다. 언제든 답해줄 수 있는 것처럼 굴고 은근히 먼저 물어봐주길 기대하면서, 정작 자기가 먼저 말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그런 구석이 있었다.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고, 또 묘하게 약해 보이는 구석. 굽힌 새끼손가락처럼 유독 여리고 무른. 그런데도 그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온 세상을 그 짧은 마디에 걸어보는 것 같은 무모한 구석도, 소년은 또한 지니고 있었다.

  처음 사냥꾼에게서 벗어났을 때부터 그녀는 줄곧 달아날 생각만 했다. 그게 누구든, 길을 막아서고 그들을 쫓아오는 이들로부터 도망치는 일. 매 순간이 벼랑 끝이고 다음 순간은 낭떠러지 밑일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건 저편에 놓인 길로 건너가는 것. 그 다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다음이라는 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을 기약하는 것 같은 소년의 ‘의식’은 그렇기에 낯설었다. 다만 기대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새끼손가락에 걸어두었을 어떤 희망사항을 끝까지 묻지 않은 건, 그 애가 언젠가 제 고집을 꺾어서라도 먼저 말해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런 애니까. 그런 애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언젠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우리들 앞으로 찾아왔지만, 네가 바랐던 게 이런 모양은 아니었겠지. 꿈에서 깨어난 여인은 거울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제 새끼손가락을 쓸어보았다. 바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 앤 순수하고도 무거운 소망을 남몰래 품어왔던 거였다. 그래서 그만큼 침묵했을지도 몰랐다. 입 밖으로 흘려보내는 순간 바라던 게 깨질 거란 불안한 믿음도, 그 애는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었던 건지도.

   그런데도 자기에게만큼은 언젠가 비밀을 말할 수 있다는 것처럼 굴었던 건, 뭐였을까. 뭔지도 모르면서 맞장구쳐준 난 뭐였을까. 왜 그랬던 거지. 여인은 흐른 세월만큼이나 길고 길어진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손가락을 기꺼이 얹어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했다. 좋건 싫건 그의 기약 없는 약속에 동참했다는 것에 대해서. 빗이 헝클어진 부분에서 자꾸만 턱턱 걸렸다.


  ——언젠가가 있을 거라고 믿어보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너나 할 것 없이 그 뿌연 브라운관 앞에 서성이던 그네들처럼,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닿으면 너의 약속이 내 약속으로 번져갔던 걸까. 지직거리면서 휘어지고 꼬이고 파동을 일으켜 휘어진 건물과 골목 사이사이로 퍼져 나가던 전파처럼. 그녀는 생각했다. 소년이 여기에 만약 있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봐, 약속이란 건 참으로 위험한 거였어. 이렇게나 전염성이 강하니까. 넌 아집이 있었으니 네 뜻이 뭐였건 끝끝내 내가 따르도록 만들었을 지도 몰라. 내가 먼저 묻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스러워. 하지만 ——


  어쩌면 내일을 기대했던 건지도 몰라. 내일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도 모르면서. ■■, 나도 너처럼,


  아, 네 이름도 이젠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엉킨 부분을 몇 번이고 빗어내렸다. 하지만 네 이름따위 다시 입에 올려본들 이미 늦었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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