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식스 4

togetherness

이름을 안 것은 사냥꾼에게서 도망치고도 훨씬 뒤였다. 숨을 죽여야 죽임당하지 않는 때가 잦았고 잰걸음으로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매번 이어졌다. 그런 긴급한 때에 서로를 부르기란 저어—기 나 야아— 면 충분했다. 목소리의 크기와 높낮이를 달리하며 손짓을 섞어가면 그런대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대화가 꼭 길어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게 사적인 잡담이어야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잡담을 할 여유는 애당초 없었다. 밧줄의 매듭이 풀어지자 소녀는 곧장 천장에서 떨어졌다. 소녀는 떨어진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 헉, 하고 숨을 짧게 들이쉰 걸 보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소년은 뻗은 손을 잠깐 뒤로 물렸다. 혹시 소녀를 채갔던 도자기 인형..

promise

그 애는 약속을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식스, 하고 제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놓고서. 아, 그 목소리는, 그 이름은 얼마나 오래되었나. ...그 애가 이름을 불러 막상 돌아보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새끼손가락부터 불쑥 내밀고 있는 걸 보면 참 그랬다. 식스는 고분고분 제 손가락을 내밀면서도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거지, 싶었다. 이렇게나 작은 손가락들이, 서로 얽히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자기가 손가락을 걸어주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이게 왜 너한테 중요해, 하고 묻고 싶었다. 여기에 대고 너는 뭘 빌고 있는 거야.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거야. 무얼 바라는 거야. 언제 어떻게 끝장날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묻진 않았다. 손가락 마디를 굽혀 슬그머니 걸어주기만 해도 우스꽝스..

recollection

품 안에서 노움이 꼼지락거렸다. 무언가 말할 게 있다는 듯이. 노움들은 이곳의 토박이었다. 고깔 모자를 눌러 쓴 이 작은 족속들은 특별히 방해받지 않고도 어디든 작은 두 발이 허락하는 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살아있는 건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이곳의 먹이 사슬에서 유일하게 비껴나간 건 다름 아닌 그들이 이미 이곳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온갖 기이한 소문과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그와 달리 여기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움들은 대개 길 잃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들이 포옹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챘다. 첫째로 그들은 체온이 없어서 늘 몸을 덥힐 만한 게 필요했고, 둘째로 포옹은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기에 가장 편안한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노움들은 중요..

old stories

언제나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들이 발에 채였다.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처럼. 한 입도 대지 않았지만 먼지 쌓여 상해가는 치즈 조각, 또는 바닥에 어쩌다 굴러다니는 당근처럼. 침대나 테이블 아래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이야기들, 비밀들. 그런 이야기들은 절망스럽게도 결말이 꽉 닫혀 있었고 희망 따위는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배고픈 아이가 사탕이 가득 든 병을 발견하고 손 안 가득 사탕을 움켜쥐었다가 병에서 손이 빠지지 않아 손을 절단해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꼭 그랬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도처에 가득했다.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 사탕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잃어버린 손의 사연. 그 누구도 아이의 이름,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내지르던 비명 따위는 기억해주지 않았다. 부엌에는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