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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ue Detective ] Holy Cross

도로가 영원처럼 길게 뻗어있다. 허물어진 빈집과 이정표가 유령처럼 양 옆을 스쳐 지나간다. 잿빛 도로. 햇살조차 상해버리는 길. 그 길 위를 달리며 그들은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다. 우린 십자가의 세로선을 가로지르는 중이야. 무시당할 걸 알지만 러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생각을 정제된 언어로 옮긴다. 그래? 그럼 가로선은? 다소 비아냥대는 말투지만 마티가 의외로 받아쳐준다. 거기에까지 도달할 수 있지는 모르겠군. 이미 도달했는데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고. 러스트가 말한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 하지만 제대로 지고 사는 사람은 드물지. 무겁다고 불평하면서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자들이 태반이니까. 아니면 애초에 이건 자기 십자가가 아니라고 우기거나 내가 왜 이따위 무게를..

기타 장르 2024.06.06

[ True Detective ] 여파

러스트가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을 흘끔 보는 동안 마티는 오로지 도로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뭉툭한 손가락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쉴새없이 꿈틀거렸다. 손톱에 미처 닦지 못한 흙먼지가 묻어있었다. 마티는 불안정하게 운전대를 고쳐잡았다. 에어컨을 켰는데도 마티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연신 흘러내리는 것을 러스트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 세워. 뭐라고? 마티가 고개를 홱 돌려 조수석에 앉은 러스트를 노려봤다. 난데 없이 유리조각에 찔린 것처럼 날선, 그리고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세우라고. 차를. 러스트가 재차 말했다. 마티가 잔뜩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고 씩씩거렸다. 사실은 겁먹은 것이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거기로 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도. 주위를 봐. 우리 말고 아무도 없어, 마티. ..

기타 장르 2024.06.06

[ BBC Sherlock ] IOU

사과, 를 베어무는 소리가 머리 뒤쪽에서 들렸다.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치아가 깨문 것이, 이어서 턱을 움직여 씹는 내용물이 사과임을 알아챈다. 자명한 증거가 사고회로에서 정보와 자료로 처리되었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지만, 그럼에도 셜록은 곁눈질로 존을 쳐다본다. 존은 오른손에 두 번 접은 신문을, 왼손에 사과를 들고 있다. 쓸데없어, 라며 뇌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시선은 그보다 빠르게 사과의 표면을 훑는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윤기가 반들거리는 붉은색 과육 껍질에 불과하다. 시선은 이제 존의 얼굴로 옮겨붙는다. 저번보다 평균 0.5cm 정도 더 길어진 머리칼. 오른쪽 볼이 유난히 튀어나와 있다. 아침에 면도한 턱이 움직이는 모양을 따라 안쪽 어금니가 사과를 뭉개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기타 장르 2024.06.06

togetherness

이름을 안 것은 사냥꾼에게서 도망치고도 훨씬 뒤였다. 숨을 죽여야 죽임당하지 않는 때가 잦았고 잰걸음으로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매번 이어졌다. 그런 긴급한 때에 서로를 부르기란 저어—기 나 야아— 면 충분했다. 목소리의 크기와 높낮이를 달리하며 손짓을 섞어가면 그런대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대화가 꼭 길어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게 사적인 잡담이어야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잡담을 할 여유는 애당초 없었다. 밧줄의 매듭이 풀어지자 소녀는 곧장 천장에서 떨어졌다. 소녀는 떨어진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 헉, 하고 숨을 짧게 들이쉰 걸 보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소년은 뻗은 손을 잠깐 뒤로 물렸다. 혹시 소녀를 채갔던 도자기 인형..

promise

그 애는 약속을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식스, 하고 제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놓고서. 아, 그 목소리는, 그 이름은 얼마나 오래되었나. ...그 애가 이름을 불러 막상 돌아보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새끼손가락부터 불쑥 내밀고 있는 걸 보면 참 그랬다. 식스는 고분고분 제 손가락을 내밀면서도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거지, 싶었다. 이렇게나 작은 손가락들이, 서로 얽히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자기가 손가락을 걸어주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이게 왜 너한테 중요해, 하고 묻고 싶었다. 여기에 대고 너는 뭘 빌고 있는 거야.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거야. 무얼 바라는 거야. 언제 어떻게 끝장날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묻진 않았다. 손가락 마디를 굽혀 슬그머니 걸어주기만 해도 우스꽝스..

recollection

품 안에서 노움이 꼼지락거렸다. 무언가 말할 게 있다는 듯이. 노움들은 이곳의 토박이었다. 고깔 모자를 눌러 쓴 이 작은 족속들은 특별히 방해받지 않고도 어디든 작은 두 발이 허락하는 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살아있는 건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이곳의 먹이 사슬에서 유일하게 비껴나간 건 다름 아닌 그들이 이미 이곳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온갖 기이한 소문과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그와 달리 여기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움들은 대개 길 잃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들이 포옹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챘다. 첫째로 그들은 체온이 없어서 늘 몸을 덥힐 만한 게 필요했고, 둘째로 포옹은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기에 가장 편안한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노움들은 중요..

old stories

언제나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들이 발에 채였다.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처럼. 한 입도 대지 않았지만 먼지 쌓여 상해가는 치즈 조각, 또는 바닥에 어쩌다 굴러다니는 당근처럼. 침대나 테이블 아래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이야기들, 비밀들. 그런 이야기들은 절망스럽게도 결말이 꽉 닫혀 있었고 희망 따위는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배고픈 아이가 사탕이 가득 든 병을 발견하고 손 안 가득 사탕을 움켜쥐었다가 병에서 손이 빠지지 않아 손을 절단해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꼭 그랬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도처에 가득했다. 영원히 충족되지 못한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 사탕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잃어버린 손의 사연. 그 누구도 아이의 이름,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내지르던 비명 따위는 기억해주지 않았다. 부엌에는 노..